다시 가 본 올챙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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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 본 올챙이 적”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처음으로 서울 가면서 고속버스에 몸을 얹었다. 서울로 유학 가는 중이었다. 그보다 한 2년쯤 전, 그러니까 고속버스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특히 시골에서 고속버스를 타 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그때, 우리교회 목사님이 볼일이 있어 서울을 다녀오셨는데 고속버스에서 본 신기한 모습을 설명 하셨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비가 왔는데 빗물이 차창에서 옆으로 흐르더라고 하시며 얼마나 신비롭게 말씀을 하시든지. 그 때 시골에서는 덜커덩거리는 비포장도로에 완행버스가 느린 속도로 가기 때문에 비가 오면 빗물은 그냥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아주 정상적인 모습만 보고 살아왔다. 그런 우리는 빠른 속도로 가는 고속버스에 빗물이 닿으니 그 속도 때문에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퍼져가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고 설명하시는 목사님보다 더 놀라 넋을 놓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처음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나는 목사님의 그 말씀을 생각하며 신기한 모습을 나도 볼 행운이 찾아올까를 기대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날씨는 너무 맑았고, 햇빛은 얄미울 만큼 청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또 신비롭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쩌면 길이 그렇게도 넓은지. 시골 작은 비포장도로에서 차 두 대가 교행 할 넓이도 없어서 맞은편에 차가 오면 서로가 서행 하며 조심스럽게 피해 지나가야 하는 길만 보고 자란 나에게는 그 넓은 길로 쌩쌩 달리는 버스가 신비, 그 이상이었다.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에 넓고도 광활한 대지를 보는 듯 속이 다 시원해져 왔다.
시골이 답답하다고 느껴왔지만 서울에서는 시골과 또 다른 답답함이 있었다. 공기도 맑지 못하고, 자연도 내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고, 아기자기한 시골의 인정도 피부에서 자꾸 떨어져나갔다. 뭔가 공허함과 허전함이 나를 억누를 즈음 방학을 맞은 나는 시골 행을 결정했다. 날짜를 잡아놓고 나의 마음이 얼마나 들떠서 부풀었는지 모른다. 우선 무엇보다도 답답하고 경직된 서울을 벗어난다는 것이 가장 행복이었다. 그 탁 트인 고속도로를 보면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또한 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고속버스에 오르고 난 후, 우선 편안한 자세로 마음도 몸도 가다듬었다. 숨도 고르고, 시원함과 행복을 느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빨리 차에 오늘 덕에 창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왔다. 혹시 옆자리에 뚱뚱한 아저씨라도 앉으면 몸을 움츠리느라 짜증스러워 기대로 가득 부풀어 있는 내 마음에 흠이라도 생길까 하여, 아니면 수다스러운 아주머니가 앉아 밖을 내다봐야하는 내 시선을 자신에게로 끌려고 할까 잔득 염려되는 마음으로 내 곁에 앉게 될 사람에게 신경을 썼다. 다행히 내 옆자리에 앉은 내 또래의 아기씨는 책을 꺼내 들어서 적이 안심했다.
버스가 서울을 출발한지 한 30분이 지났는데도 내가 기다리는 그 ‘넓고도 확 트인 길’이 나오지를 않았다. 아마, 아직도 서울을 완전히 벗어나지를 않았나보다, 조금 더 가야하나 보다 생각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갔건만 내가 처음 서울 올 때 보아온, 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 그리고 이제 또 다시 그렇게 해줄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 하는 것인가. 답답하다 못해 서서히 지쳐갔다. 결국 내가 목적한 곳에 이를 때까지 그 야속한 길은 내 앞에 나타나 주지를 않았다.
집에 와서 깊이 생각에 잠겼다. 길이 바뀌었을까? 아니야, 더 작아질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왜 그 길은 보이지 않은 것일까?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게끼를 그냥 안고 시골 방문을 모두 마치고 서울행 버스에 올라 다시 나의 눈은 내가 찾는 그 ‘넓게 탁 트인 도로’를 다시 찾기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보고 싶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허전하고도 아쉽게 나의 시골여행은 막을 내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어느 날,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가던 나는 ‘아! 그랬구나.’ 라는 신음 비슷한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늘 시골의 그 좁고도 좁은 길만 보아오던 나는 처음으로 대하는 고속도로의 넓이에 놀라 대단한 큰 길이라고 생각하고 감격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얼마동안 살면서 광화문 사거리 같은 왕복 12차선(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도로를 보고 살아간 나의 눈은 커져갔을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 겨우4~6차선의 길을 보고, 처음 봤을 때의 그 시원함과 놀랍도록 넓은 느낌을 가지려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시골에서 서울 올 때와는 다르게 서울에 살면서 나의 시각은 엄청나게 바뀌어 있었다.
고향친구가 초등학교4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했다. 우리 고향은 강과 바다가 합쳐지는 곳이다. 내륙 저 안쪽에서부터 작은 냇물들이 모여서 하나의 강을 이루어 그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데 50개의 내가 흘러온다 하여 강의 이름이 ‘오십천’이다. 그리고 그 강은 바다와 이어지는데 그 곳에는 다리가 하나 있다.
서울로 이사 간 친구는 그 다리가 너무나 멋있게 기억이 남아서 늘 그리워하며 언젠가 한번은 고향에 돌아가 그 멋진 다리를 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두고도 늘 마음에는 고향의 그 ‘멋진 다리’를 생각하며 자기 아이들에게 “엄마의 고향, 시골에 가면 쎄느강 다리처럼 멋진 다리가 있단다.”라고 말을 하고 그리워하며 지냈다. 그런 아내를 보는 남편은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그 소원을 들어 주어야겠다 생각하고 여름휴가를 내어 아내의 고향에 내려왔다. 남편은 물론, 아이들까지 쎄느강의 다리만큼이나 멋진 다리를 보고 싶어 부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친구는 정말 꿈을 꾸는 듯이 다시 보게 될 시골의 풍경과 어릴 때의 추억이 가득한 그 ‘강구교’를 떠올렸다. 가슴가득 부푼 꿈과 남편과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며 자랑할 그 다리를 생각하고 기뻐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리워 목 메이던, 단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꿈꾸던 그 아름답고 멋진 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곳에는 너무나 낡고 초라한, 차 두 대도 교행하기 어려운 작은 다리 하나만 놓여있었으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시각의 변화가 얼마나 많은지. 어릴 때는 그렇게도 멀리, 십리는 더 될 것 같은 학교 운동장. 가끔씩 학교가 늦을 때는 운동장이 조금만 작았어도 걸어가는 길이 좀 짧았을 것이라고 느끼며 힘들어 하던 학교 운동장. 다 자라서 바라보니 몇 발자국만 걸으면 끝나는 짧은 거리인 것을.
아이의 방학을 맞아 내 올챙이 적을 찾아가보려 한다. 투명하여, 물속에 있는 조약돌의 모양이 어떠한가도 다 보이는 맑고 깨끗한 냇가에, 어릴 적 그러했듯이 몸을 담그고 싶다. 고향 초등학교가 모교인 재일교포가 학교에 헌납한 야마하피아노. 세상에 저렇게 맑고 고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있을까 생각했던 그 피아노를 한번 쳐보고 와도 좋겠다.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외가동네도 가서 외사촌들과 뛰어놀던, 울퉁불퉁한 돌멩이들이 발에 걸려 넘어졌던 그 작은 시골길을 달려보고도 싶다.
아마 내가 살던 그 곳에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겠지?
* 오늘 새벽, 고향을 다녀오신 목사님께서 고향에서 느낀 것을 말씀하시던 중에 생각나는 부분이 있어서 이 글을 올려봅니다 ^^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처음으로 서울 가면서 고속버스에 몸을 얹었다. 서울로 유학 가는 중이었다. 그보다 한 2년쯤 전, 그러니까 고속버스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특히 시골에서 고속버스를 타 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그때, 우리교회 목사님이 볼일이 있어 서울을 다녀오셨는데 고속버스에서 본 신기한 모습을 설명 하셨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비가 왔는데 빗물이 차창에서 옆으로 흐르더라고 하시며 얼마나 신비롭게 말씀을 하시든지. 그 때 시골에서는 덜커덩거리는 비포장도로에 완행버스가 느린 속도로 가기 때문에 비가 오면 빗물은 그냥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아주 정상적인 모습만 보고 살아왔다. 그런 우리는 빠른 속도로 가는 고속버스에 빗물이 닿으니 그 속도 때문에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퍼져가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고 설명하시는 목사님보다 더 놀라 넋을 놓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처음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나는 목사님의 그 말씀을 생각하며 신기한 모습을 나도 볼 행운이 찾아올까를 기대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날씨는 너무 맑았고, 햇빛은 얄미울 만큼 청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또 신비롭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쩌면 길이 그렇게도 넓은지. 시골 작은 비포장도로에서 차 두 대가 교행 할 넓이도 없어서 맞은편에 차가 오면 서로가 서행 하며 조심스럽게 피해 지나가야 하는 길만 보고 자란 나에게는 그 넓은 길로 쌩쌩 달리는 버스가 신비, 그 이상이었다.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에 넓고도 광활한 대지를 보는 듯 속이 다 시원해져 왔다.
시골이 답답하다고 느껴왔지만 서울에서는 시골과 또 다른 답답함이 있었다. 공기도 맑지 못하고, 자연도 내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고, 아기자기한 시골의 인정도 피부에서 자꾸 떨어져나갔다. 뭔가 공허함과 허전함이 나를 억누를 즈음 방학을 맞은 나는 시골 행을 결정했다. 날짜를 잡아놓고 나의 마음이 얼마나 들떠서 부풀었는지 모른다. 우선 무엇보다도 답답하고 경직된 서울을 벗어난다는 것이 가장 행복이었다. 그 탁 트인 고속도로를 보면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또한 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고속버스에 오르고 난 후, 우선 편안한 자세로 마음도 몸도 가다듬었다. 숨도 고르고, 시원함과 행복을 느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빨리 차에 오늘 덕에 창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왔다. 혹시 옆자리에 뚱뚱한 아저씨라도 앉으면 몸을 움츠리느라 짜증스러워 기대로 가득 부풀어 있는 내 마음에 흠이라도 생길까 하여, 아니면 수다스러운 아주머니가 앉아 밖을 내다봐야하는 내 시선을 자신에게로 끌려고 할까 잔득 염려되는 마음으로 내 곁에 앉게 될 사람에게 신경을 썼다. 다행히 내 옆자리에 앉은 내 또래의 아기씨는 책을 꺼내 들어서 적이 안심했다.
버스가 서울을 출발한지 한 30분이 지났는데도 내가 기다리는 그 ‘넓고도 확 트인 길’이 나오지를 않았다. 아마, 아직도 서울을 완전히 벗어나지를 않았나보다, 조금 더 가야하나 보다 생각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갔건만 내가 처음 서울 올 때 보아온, 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 그리고 이제 또 다시 그렇게 해줄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 하는 것인가. 답답하다 못해 서서히 지쳐갔다. 결국 내가 목적한 곳에 이를 때까지 그 야속한 길은 내 앞에 나타나 주지를 않았다.
집에 와서 깊이 생각에 잠겼다. 길이 바뀌었을까? 아니야, 더 작아질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왜 그 길은 보이지 않은 것일까?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게끼를 그냥 안고 시골 방문을 모두 마치고 서울행 버스에 올라 다시 나의 눈은 내가 찾는 그 ‘넓게 탁 트인 도로’를 다시 찾기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보고 싶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허전하고도 아쉽게 나의 시골여행은 막을 내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어느 날,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가던 나는 ‘아! 그랬구나.’ 라는 신음 비슷한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늘 시골의 그 좁고도 좁은 길만 보아오던 나는 처음으로 대하는 고속도로의 넓이에 놀라 대단한 큰 길이라고 생각하고 감격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얼마동안 살면서 광화문 사거리 같은 왕복 12차선(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도로를 보고 살아간 나의 눈은 커져갔을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 겨우4~6차선의 길을 보고, 처음 봤을 때의 그 시원함과 놀랍도록 넓은 느낌을 가지려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시골에서 서울 올 때와는 다르게 서울에 살면서 나의 시각은 엄청나게 바뀌어 있었다.
고향친구가 초등학교4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했다. 우리 고향은 강과 바다가 합쳐지는 곳이다. 내륙 저 안쪽에서부터 작은 냇물들이 모여서 하나의 강을 이루어 그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데 50개의 내가 흘러온다 하여 강의 이름이 ‘오십천’이다. 그리고 그 강은 바다와 이어지는데 그 곳에는 다리가 하나 있다.
서울로 이사 간 친구는 그 다리가 너무나 멋있게 기억이 남아서 늘 그리워하며 언젠가 한번은 고향에 돌아가 그 멋진 다리를 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두고도 늘 마음에는 고향의 그 ‘멋진 다리’를 생각하며 자기 아이들에게 “엄마의 고향, 시골에 가면 쎄느강 다리처럼 멋진 다리가 있단다.”라고 말을 하고 그리워하며 지냈다. 그런 아내를 보는 남편은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그 소원을 들어 주어야겠다 생각하고 여름휴가를 내어 아내의 고향에 내려왔다. 남편은 물론, 아이들까지 쎄느강의 다리만큼이나 멋진 다리를 보고 싶어 부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친구는 정말 꿈을 꾸는 듯이 다시 보게 될 시골의 풍경과 어릴 때의 추억이 가득한 그 ‘강구교’를 떠올렸다. 가슴가득 부푼 꿈과 남편과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며 자랑할 그 다리를 생각하고 기뻐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리워 목 메이던, 단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꿈꾸던 그 아름답고 멋진 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곳에는 너무나 낡고 초라한, 차 두 대도 교행하기 어려운 작은 다리 하나만 놓여있었으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시각의 변화가 얼마나 많은지. 어릴 때는 그렇게도 멀리, 십리는 더 될 것 같은 학교 운동장. 가끔씩 학교가 늦을 때는 운동장이 조금만 작았어도 걸어가는 길이 좀 짧았을 것이라고 느끼며 힘들어 하던 학교 운동장. 다 자라서 바라보니 몇 발자국만 걸으면 끝나는 짧은 거리인 것을.
아이의 방학을 맞아 내 올챙이 적을 찾아가보려 한다. 투명하여, 물속에 있는 조약돌의 모양이 어떠한가도 다 보이는 맑고 깨끗한 냇가에, 어릴 적 그러했듯이 몸을 담그고 싶다. 고향 초등학교가 모교인 재일교포가 학교에 헌납한 야마하피아노. 세상에 저렇게 맑고 고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있을까 생각했던 그 피아노를 한번 쳐보고 와도 좋겠다.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외가동네도 가서 외사촌들과 뛰어놀던, 울퉁불퉁한 돌멩이들이 발에 걸려 넘어졌던 그 작은 시골길을 달려보고도 싶다.
아마 내가 살던 그 곳에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겠지?
* 오늘 새벽, 고향을 다녀오신 목사님께서 고향에서 느낀 것을 말씀하시던 중에 생각나는 부분이 있어서 이 글을 올려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