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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인도자의 자격, 실력의 문제라기보다 자세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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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후 나는 종종 제자훈련의 진미를 몰랐다면 내 목회 생활이 퍽 황량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제자훈련이 나의 목회의 행복도를 가늠하는 절대적인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훈련생들과 몇 시간씩 함께 둘러앉아 은혜를 나누던 그 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예배 참석자가 만 명을 넘어서고 건강을 다쳐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나는 제자훈련에 이어 사역훈련까지도 부교역자에게 넘겨야 했다. 그때 가끔씩 남몰래 부교역자가 인도하는 사역훈련반 문 밖에 서서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너무 안타까워하곤 했다. 이제는 그런 일마저 그리운 추억이 되고 있다.


아직도 나는 40여 년 전에 제자훈련을 통해서 만난 형제자매들과 또 훈련 이후에 함께 은혜를 나눈 수많은 영적 제자들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훈련이야말로 나를 행복한 목회자, 후회 없는 목회자로 만들었다는 말을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이러한 입장 때문인지 종종 나에게 어떻게 하면 제자훈련을 잘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제자훈련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을 논하자면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사는 온전한 자의 자리이기에 그 목적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킬 만큼 모든 조건을 갖춘 지도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목표가 구름에 가리운 높은 정상인 것처럼 인도자의 자격도 거기에 걸맞는 것이어야 하는데 누가 여기에 완벽하게 부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도자의 자격은 실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훈련이 성공할 확률은 훈련에 임하는 지도자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에 많이 좌우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시간 나의 경험을 살려서 자세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제자훈련은 예수님에게 빠져서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빠지는 것을 흔히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가 많으냐 적으냐는 나의 마음이 얼마만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만족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나의 제자훈련 40년을 돌아보며 몇 번이든 반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제자훈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한다는 것이다”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제자훈련에 임하는 지도자는 자기가 은혜 받은 스토리가 분명할수록 좋다.


그렇다고 무슨 별난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이런 체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럼에도 언제 은혜를 받았으며, 그 은혜가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은혜에 취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은혜는 식지 않고 지속되었다. 성경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진하게 가슴을 울리는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지, 나는 이 기간에 넘치도록 맛보면서 살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이 강렬한 은혜의 맛이 서서히 식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 은혜의 경지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때에 받은 은혜가 내 한평생의 신앙생활과 목회의 질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은혜 때문에 나의 제자훈련에 남다른 감동과 눈물과 기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은혜를 가슴에 안고 대하는 마음 자세가 제자훈련의 성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제자훈련은 자격 미달자라는 자책감을 숨기고 하는 것이다.


제자는 제자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진리이다. 지도자가 예수의 제자와 거리가 멀 때, 그를 통해 제자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지상 교회에서 성취가 불가능한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실이 제자훈련을 남보다 큰 소리로 외치는 나의 기를 꺾어 놓았고, 항상 떠나지 않는 가책을 마음에 담고 살게 만들었다.


은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모인 여순장반이었다. 나는 의도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았다. “우리는 25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옥 목사가 작은 예수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예수님의 제자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지만,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작은 예수의 모습을 투영하는 데는 매우 미흡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셈이었다. 이것이 정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내 마음에 숨겨놓고 있는 자격 미달의 지도자라는 자책감도 크게 탓하지는 않는다. 바울도 비슷한 데가 있지 않았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주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자신 있다고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갖는 지도자보다 실패의 위험을 훨씬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은 마음을 비우고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제자훈련을 하면서 마음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다. 교역자라는 권위의식, 교회를 빨리 성장시켜야 한다는 성급함, 인기와 존경에 대한 갈급증 등 별로 건강하지 못한 소원을 마음에 담고 훈련을 시키려고 드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찌끼들이 계속 남아서 악취를 풍기면 십중팔구 제자훈련은 빗나가거나 실패하고 만다.


지도자가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훈련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빈 마음을 통해서 성령은 말씀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비었는지 차 있는지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알려진다.


이상한 일이지만 훈련생들이 나의 마음을 너무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하고 놀랄 때가 자주 있었다. 나도 한때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못해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천 명의 순장이 뛰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인이 200명도 채 되지 않을 때 예배 시간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 기도였다. 이것이 한동안 교인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나를 향한 비아냥거림이 되기도 했다.


내 속에 무서운 야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도로 내가 야심에 들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음 구석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고 있던 생각의 찌끼였던 것인데, 그것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나는 정말 충고하고 싶다. 제자훈련의 열매를 넘치게 받고 싶은가? 마음을 비우고 시작하라.




제자훈련은 함께 배우고 성장하려는 열정으로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지도자가 구름 위에 앉아 있거나 설교단에 서 있거나 수많은 청중 앞에 선 스타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소수의 사람 가운데 끼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함께 뛰어가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소그룹은 ‘두세 사람’의 모임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주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은 두세 사람의 모임이나 제자들의 공동체뿐이다.


작은 공동체의 한 사람이 되어 말씀을 나누는 것이 제자훈련이기 때문에 지도자는 자연스럽게 배우는 훈련생과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은혜를 같이 나누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를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많은 지도자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가볍게 알고 넘긴다. 가르치려고만 들지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은혜를 끼쳐야 된다는 의무감은 있어도, 눈앞에 있는 형제를 통해서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부족한 것이다. 그 시간에 성령은 똑같이 역사하시는데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은혜가 임하지 않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착각할 때가 많은 것이다.


내가 제자훈련을 하면서 두려웠던 것 중에 하나는 종종 나보다 앞서 뛰는 훈련생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남자 제자반을 인도할 때였다. 말씀을 적용하는 시간에 이성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마음으로도 간음할 수 있다는 말씀이 적잖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마음으로 간음한 일이 한 번도 없는 남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그 시간 우리는 퍽 솔직해졌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변화를 받은 형제들이 여러 명이나 있었다. 우리가 논한 것은 마음에 숨겨진 감정이었는데, 그 감정이 은혜를 받으면서 깨끗해졌다는 고백을 하는 형제를 보면서 내가 매우 부끄러운 지도자라는 죄책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는 아직도 이런 사람이다’라고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경륜이 쌓여가면서 훈련생들을 통해서 내가 받아야 할 은혜가 얼마나 많은가를 더 깊이 알게 된 순간이었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평신도로부터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제자훈련을 하라. 그게 싫으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제자훈련은 집중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제자훈련을 중도에 포기하는 지도자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은 ‘집중’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집중이란 목회의 우선순위에서 제자훈련이 뒤로 밀리지 않도록 최선의 관심을 쏟는 태도를 말한다. 다른 사역이 지장을 받더라도 제자훈련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결단을 의미한다. 제자훈련에서 이 태도가 왜 성패를 좌우하는지는 1, 2년이라도 훈련을 해 본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생각이 여기저기로 흩어지거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자연히 훈련의 강도가 떨어지고 힘이 드니까 쉽게 포기해버린다. 그래서 대부분 성경 공부 프로그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자화자찬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자훈련에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린 일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외부에서 집회를 요청해도 열 중에 한 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외부적인 행사나 조직에 참여하는 것도 최대한 절제했다. 심지어 가족들과 단란하게 시간을 가지는 것도 많이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목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제자훈련에 도움이 되는 것들 한두 가지를 빼고는 거들떠보지를 않았다. 목회 콘텐츠를 할 수 있는 한 단순화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런 예들은 제자훈련에 집중하고자 하는 나의 결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만일 내가 제자훈련을 부교역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밖으로 돌면서 사역을 했든지, 싫증이 나서 이것저것에 손을 대었더라면 오늘의 사랑의교회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집중해서 개인적으로 치른 대가가 만만치 않았지만,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제자훈련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이 한 가지에만 전념을 하기에도 목회 인생이 너무나 짧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은 영적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교회와 대결해서 진을 치고 있는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의 양적인 부흥일까? 목회자의 탁월한 설교일까? 아니면 예배나 프로그램에 부지런히 출석하는 성도들의 열심일까? 나는 아니라고 믿고 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가장 작아 보이는 자라도 천을 이루고, 가장 약해 보이는 자라도 강국을 이루는 놀라운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기적을 구경하고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만 명의 무리와 같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는 마귀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제자훈련만큼 마귀의 유혹과 도전이 격심한 목회 현장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40년 동안 목회 하면서 제자훈련에 집중하는 나를 사탄이 얼마나 집요하게 시험하고 공격하고 또 자주 쓰러뜨렸는지 모른다. 이 모든 시험을 이겨야 제자훈련이 성공할 수 있다. 가끔은 패배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어떤 목회자는 너무 싱겁게 백기를 드는 것 같다. 몸이 좀 피곤하니까, 부끄러운 스캔들에 휘말려서, 교회가 좀 성장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등의 이유로 제자훈련을 내려놓는 것을 본다. 이런 지도자들은 그것이 사탄의 간교한 유혹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버리는 자와 같다.


단적으로 말해서 제자훈련은 치열한 영적 전투이다. 지도자는 그 전투의 선봉에 선 장군과 같다. 적진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영안을 가지고, 때마다 적절한 대처를 하면서 자기도 지키고 훈련생들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제자훈련은 최선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차선의 모범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목회자에게 정말 두렵고, 어려운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청중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강의는 해박한 지식의 그늘에 자신의 진면모를 숨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심방이나 상담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열 명 내외의 소그룹 안에서 지도자의 모든 것이 노출되고 만다. 말씀 앞에서 모두가 벌거벗은 것같이 자기를 드러내는데 지도자라고 해서 정장을 하고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좀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티끌만큼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작은 예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훈련생들이 알게 모르게 따르게 되는 최선의 모범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훈련 교재는 있는데 살아 있는 모범이 보이지 않는 죽은 훈련이 될 수 있다.


내가 제자훈련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그동안 내가 모범이 되지 못해 영적으로 실족한 훈련생들이 얼마나 될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의 모범이 못되면 차선의 모범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감히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던 것 같다.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좋은 목사가 되고 싶은가? 제자훈련에 미쳐라.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온 교회가 존경하고 따르는 모범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남을 위해 하는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이 더 솔직한 고백일 것 같다.




제자훈련은 기막힌 행복을 누리면서 하는 것이다.


목회자만이 아는 행복의 비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해도 남모르게 누리는 행복의 비밀들이 있다. 누가 나에게 목사로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제자훈련을 통해 영적으로 잠자던 자들이 깨어나고, 삶의 목적이 바뀌고 인격적인 결함이 치유되고 가치관이 달라지는,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아름답게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것이 한 번의 변화로 끝나지 않고 10년이 넘도록 지속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감격해 할 때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매우 행복한 목회자였다.


흔히들 나를 보고 매 주마다 수만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느냐고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설교가 나에게 보람은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교의 부담감 때문이었다. 설교에 실망하고 돌아가는 숨은 군중들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강대상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없지 않았다.


나의 진짜 보람과 행복은 제자훈련의 현장에서 자주 체험했다. 설교를 통해서 은혜 받고 변화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누가 은혜를 받았는지 그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이 말씀이 실제로 입증되는 사역이 제자훈련이다.


나처럼 모자라는 사람이 가르치는 자리에서 어떻게 저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것은 사람의 머리로는 풀 수 없는 신비한 수수께끼다.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는가를, 제자훈련을 하면서 시간마다 경험하는 행복을 누려보지 않고 어떻게 이 신비를 알 수 있겠는가?


그동안 나는 제자훈련을 통해 놀라운 열매를 거두는 목회자치고 행복해하지 않는 자를 한 사람도 본 일이 없다. 어떤 때는 은퇴해서 늙어가는 나의 처지로 보면 샘이 날 정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왜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는지 나는 조금은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목회가 힘든가? 감격이 없는가?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예수의 제자를 생산하는 제자훈련의 현장으로 찾아가라. 거기에 당신이 찾고 있는 정확한 해답이 있다.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당신을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디사이플’(국제제자훈련원) 2010년 1월호 칼럼 ‘제자훈련 인도자가 갖춰야 할 조건’에서